송곳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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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송곳니 (2009)

Kynodontas Dogto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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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정보

   드라마, 코미디 | 그리스 | 93 분 | 개봉 2012-01-05 | 청소년관람불가 

홈페이지

   해외 www.dogtooth.gr	

제작/배급

   ㈜컴퍼니 엘 (수입)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출연

   크리스토스 스테지오글로 (아버지 역), 아겔리키 파푸리아 (큰 딸 역), 마리 초니 (작은 딸 역), 안나 칼라이치도 (크리스티나 역)  

줄거리

높은 담장으로 둘러 쌓인, 넒은 정원과 수영장이 딸린 도시 근교 한 저택에 아이들 세 명을 세상과 완전히 단절시킨 채 양육하는 부모가 있다. 그들은 바깥 세상과는 철저히 단절되어 있으며 유일하게 아버지만이 외부로 나갈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적인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가끔 회사 경비인 크리스티나를 들이고, 마당에 나타난 고양이는 무서운 침입자로 교육시킨다. 이들의 등장과 자그마한 틈새 사이로 순종적이기만 했던 큰딸은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송곳니가 빠져야만 어른이 되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아버지. 바깥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만 가던 큰딸은 충격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되는데…

정적이고 간결한 형식과 폭력적 억압에 관한 고찰 <송곳니>

바다에 앉아 있자니, 소풍 바닥에 놓인 좀비 두 송이가 보여요. 수수께끼도, 일부러 어법을 흐린 시 구절도 아니다. < 송곳니 > 의 가족에게는 이 괴상한 문장이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의 일부다. 이들은 수영장과 넓은 정원이 있는 저택에서 세상과 격리된 채 살고 있다. 공장 관리자인 아버지(크리스토스 스테르기오글루)만 차를 몰고 높은 담장 밖을 넘나들 뿐이다. 그는 아내(미셀 발리)와 함께 언어와 정보를 조작하며, 성인이 다 된 자녀들의 지식을 통제한다. 이 때문에 안락의자를 바다로, 건축 재료를 소풍으로, 작고 노란 꽃을 좀비라 부르며, 전화를 달라는 부탁에 소금을 건네는 식의 상황이 부조리극처럼 이어진다. 그런데 이 폐쇄적인 공간에도 고정적인 방문객이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공장의 경비원 크리스티나(아나 칼라이치도)를 집 안에 들이고, 그녀는 외부 세계에 호기심을 보이는 첫째 딸(아게리키 파루리아)과 거래를 시작한다. 잔잔하고 무료한 일상에서 세 남매의 이상행동이 불거질 때 즈음, 부모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이 엉뚱한 가족의 이야기는 점점 잔혹해진다.

2009년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수상한 < 송곳니 > 는 억압과 기만의 기제를 갖고 움직이는 소세계에 대한 정치적 우화다. 지오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언급대로, "지도자들과 거대 미디어가 어떻게 진실로부터 국민들을 고립시키며 단편적인 지식만을 주입하는가"의 문제가 가족의 권력 관계를 통해 은유된다. 아버지는 고양이를 위협적인 존재로 둔갑시켜 자식들의 두려움과 분노를 조장하고, 일부러 피칠갑을 하고는 외부 세계의 위험성을 과장한다. 그는 훈련 결과와 충성도에 따라 특권을 주는 등 회유와 협박으로 능란하게 세 남매를 통제한다. 그에 반해 자식들은 철저히 무지하며 무능하다. 이들은 모형 비행기가 담장 밖에 떨어져도 그것을 줍기 위해 단 몇 발자국을 움직이지 못하며, 송곳니가 빠져야만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규칙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유치한 트릭에도 쉽게 굴복하는 이들의 모습은 때로 실소를 자아내지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속임수 앞에서도 실제 현실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돌이켜본다면 그 웃음이 남긴 잔상은 사뭇 서늘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방 안에서 은밀히 섹스를 한다. 그리고는 잠시 뒤 잦아들었던 음악이 다시 확장되면서 남매가 헝겊으로 눈을 가린 채 훈련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눈을 가리지 않았을 때조차 줄곧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심리를 정의할 마땅한 단어도 모른 채 불안과 고통을 겪고 있다. 오직 서로에 대한 폭력과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현실에 대한 진통을 드러낼 뿐이다. 이들의 막연한 무력감은 화면 구성을 통해서도 암시된다. < 송곳니 > 에는 신체의 일부만 드러낸 숏이 유독 많다. 화면 한쪽에 어깨나 뒤통수만을 걸치고 있던 인물이 한참 뒤 화면 중앙에 나타나 급작스런 동작을 행하는 패턴도 이어진다. 그동안 카메라는 어딘가 잘리고 균형이 맞지 않는 공간을 가만히 응시한다.

정적이고 간결한 형식과 폭력적 억압에 관한 고찰. 굳이 비교하자면 < 송곳니 > 는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 송곳니 > 의 인물들은 < 퍼니 게임 > 같은 통제 불능의 불안 속에서 < 하얀 리본 > 의 선택으로 몰아진다. 그러나 하네케의 영화는 일상의 언저리에서 그 일상성을 놓치지 않은 채 정치적인 메시지를 알레고리로 담아낸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들이 느끼는 불안과 긴장이 현실감있게 다가오면서도 그 이상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에 반해 < 송곳니 > 의 이야기는 좀더 인위적으로 구성된 느낌이다. 각각의 에피소드와 인물들의 행위도 그 상징적인 함의를 매우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편이며 그마저 감독의 머릿속에서 미리 계산되어 연역적으로 주어진 듯하다. 그러다보니 큰딸의 마지막 결단도 영화가 의도한 폭발적인 힘을 발산하지는 못한다. 이 결정적인 장면에서도 카타르시스나 통렬한 비애보다는 자극과 선정, 그것도 매우 추상적인 선정성이 앞선다. 우울하고도 기괴한 시대의 자화상을 다소 기계적인 퍼펫쇼로 연출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 영화다.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ediaReviewRead.do?movieId=51686&articleId=1614046&t__nil_main_mediareview=text

트렁크에 갇혀서는 안 된다.

   작성시간 : 2012/12/27 14:21
   퍼머링크 : cantejondo.egloos.com/3006207
   카테고리 : 흐르는 영화들
   작성자 : 잊혀진 시민


1) 송곳니.그리스의 신예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정치적 우화다.사람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어떤 체제에 대한 우화적 이야기.그러나 이 영화의 어떤 점은 우화를 넘어선다.그래서 우리는 우화 너머의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그러나 가능할런지 모르겠다.(현재 약간의 멘붕상태이기 때문)


2) 또 하나의 문제는 '체제'.과연 이 영화는 '독재' 체제만을 다룬 이야기인가.아니면 모든 보편적인 체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다룬 것인가.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


3) 멘붕의 며칠간 이후 대한민국 땅에서 사는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20세기 중후반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했던 체제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그 체제의 정점을 찍었던 어떤 분의 따님이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했었으므로,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보며 어쩔 수 없이 그분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그런데 그 분이 덜컥 당선되어 버렸다.결국 그분과 결부시켜 이 영화를 생각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하염없이 늦추어질 수 밖에 없었다.


1.완벽한 통제.


영화는 사실 현실에서 일어나기에는 다소 어려운 일들을 다루고 있다.교외에 있는 넓은 저택.높게 솟은 담장 안으로 한 가족이 살고 있다.아들 하나,딸 둘.그리고 엄마와 아빠.그런데 아빠를 제외한 아무도 그 저택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말하자면 자발적으로 갇혀 있다.아빠는 공장의 관리인인 듯 보이는데,자신의 지인들에겐 아이들은 모두 죽었고,그 충격으로 아내가 집 안에만 은둔하고 있노라고 얘기하고 있는 듯 하다.즉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이 가족은 그 존재가 지워져 있는 상태다.


아이들이 저택에서 나가지 않는 이유는 아빠와 엄마가 저택 바깥을 왜곡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부모는 아이들에게,집 바깥엔 어떤 무서운 것들이 도사리고 있으며,나가기만 하면 그들의 습격을 받게 된다고 선전해 왔던 것 같다.이런 왜곡은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듯 보이며 철저하게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왔다(우린 이런 선전 과정의 결과들을 이번 대선에서 일부 목격했다)


이 왜곡 작업은 언어 자체에 의한 왜곡에서부터 시작된다.즉 아이들이 저택 외부에서 사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도록,또 아이들의 두뇌 메커니즘 자체가 엇나가게끔,아이들에게 문자의 의미 자체를 왜곡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예를 들어 바다라는 단어의 뜻은 의자이고 좀비의 뜻은 노란 꽃송이다.따라서 의자 위의 노란 꽃송이는 바다 위의 좀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언어왜곡작업에서 영화는 허점을 보이고 있다.가족간의 대화 만큼은 언어의 왜곡 없이 이루어지고,유일한 외부인인 크리스티나라는 캐릭터와도 의사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어쩌면 우리가 처음부터 이 영화를 '우화'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허점을 그냥 넘겨버리는지도 모른다.하지만 또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그것은 우리가 이러한 언어의 왜곡을 우리 주위에서 은연중에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다)

사실 폐쇄적 체제에서, 언어 의미의 왜곡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만큼은 확실하다.우리나라의 수구언론들이 사용하는 단어들만 유심히 바라보아도 충분하다.그들의 '안정','비폭력','좌익','보수'는 진정한 사전적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으며,사실 그 언어들의 의미를 재조정하고 다투는 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전투 중의 하나다.이번 대선에서 이슈가 되었던 '복지'도 그렇다.(그렇다고 우리나라가 과연 폐쇄적 체제이냐,하는 의문이 떠오를 수 있는데,그 문제는 좀 나중에 다루게 될 것이다)


문자의 의미를 왜곡하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 덕택에 이미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비문자 문화 특유의 어떤 놀이와 특이한 위계 질서와 관계망 안에서 행동한다.(다만 막내딸 만큼은 '책'을 보고 있다.이 책은 인간의 신체에 관한 책인데,이것은 인문학이나 교양 같은 요소가 배제된 상태에서 오로지 기능 만을 가진 지식인들을 우화적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숨 참기 놀이,마취약을 흡입한 다음 먼저 일어나기 놀이,눈 가리고 달리기 따위들의 놀이를 한다.폐쇄적인 정치 문화에서 권력을 가진 집단들이 제시하는 오락의 한 양상을 보는 것 같다.



문화적인 활동 역시 비유적으로 제시된다.그것은 비디오 테이프다. 독재자인 아버지는 가끔 아이들에게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주는데,그것은 그들의 어린 시절을 녹화해둔 테이프다.아이들은 그 비디오를 완전히 외웠고 다음 대사 다음 행동까지 암기했으면서도 여전히 비디오 테이프를 보면서 즐거워 한다.폐쇄적인 정치문화에서의 예술에 대한 비유.무시할 수 없는 알레고리다.언제나 똑같은 내용의 변주.텔레비젼과 영화,그리고 음악 같은 쟝르에서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일이 아닌가.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채찍만 드는 것은 아니다.아버지는 아이들이 자신의 명령에 잘 따랐을 때,스티커 한 장 씩을 선물로 - 말하자면 당근이자 훈장으로 - 하사하고,아이들에게 그것은 엄청난 자랑거리이다.그들은 스티커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듯 보이는데,독재 체제가 민중들에게 주는 그 수다한 스티커를 당연히 생각나게 하는 장면들이다.(과거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생각해 보라.가장 어이없었던 것은 반 끼리의 경쟁이었는데,나는 지금도 왜 담임 선생님들이, 우리 반이 다른 반 보다 평균 성적이 좋아지면 즐거워 하라고 가르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들에게 만큼은 섹스를 허락한다.섹스라는 에너지의 파괴력을 잘 알고 있는 듯,그래서 섹슈얼한 에너지를 권력의 입장에서도 잘 관리해야 한다는 듯,그는 자신이 관리하는 공장의 경비원인 크리스티나를 매춘부로 부리며 아들의 성적 에너지를 컨트롤한다.그는 크리스티나의 눈을 가리고 저택으로 데리고 온 다음,아들과 성관계를 갖게 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유일한 외부인인 크리스티나가 아이들에게 갖는 일정 부분의 영향력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자매들이 크리스티나에게 갖는 선망의 눈빛은 분명히 아들이 크리스티나에게 갖는 심정과는 매우 다르다.자매들은 크리스티나 옆에 찰싹 붙어 앉아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 보이나,그들은 심지어 자기들의 욕망 자체마저 잘 모르므로 영화는 여기서 다시 뒤로 넘어간다.다만 '외부의 어떤 것'이라는 존재가 그들의 영혼에 달라붙기 시작하는 것이다.하지만 두 자매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언니 쪽이 동생 쪽 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데,외부의 정보와 자극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반응의 차이를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날 아들이 크리스티나와의 성관계를 거부한 날 (그는 이유없이 오늘은 못하겠다고 말한다),크리스티나에게 약간의 변화가 생긴다.크리스티나가 아들의 방을 나와 큰 딸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핥아주면 그 댓가로 머리 클램프를 주겠다고 얘기하는 것이다.어떤 자존감 때문이었을 것이며,이것 역시 일종의 저항이다.그리고 그런 섹슈얼한 몸짓과 '교환'이 연쇄반응을 이룬다.언니는 동생에게 똑같은 일들을 제안하고 그런 일들로부터 호기심과 권태를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폭력이 발생한다.큰 딸은 자신이 가지고 놀던 비행기를 바깥으로 던져버린 동생의 팔을 칼로 긋는다.폭력이,피가 출현하는 것이다.폭력의 연쇄반응으로서 아들은 정원의 고양이를 전지용 칼로 절단해서 죽여버린다.아마도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섹슈얼한 에너지와 폭력과 피를 반항의 전제조건으로 그리고 있는 듯 하다.그러나 몇몇 요소가 더 결합되어야 할 필요를 그는 잘 알고 있다.

권력 쪽 -아버지 쪽-의 반응은 폭력 자체를 이용하여 공포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옷을 찢고 온 몸에 빨간 페인트를 바른 다음에,자신이 바깥에서 습격당했노라고 선언한다.외부의 위협 - 이 영화에서는 고양이의 위협이다- 을 강조하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고양이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개 밖에 없다면서 아이들과 아내에게 '개짖기 연습'을 시킨다.병영문화가 시작되는 것이다.(이거,이 장면에서 어찌나 실소가 터져나오는지 참을 수가 없었다.과거 냉전시절 미국과 소련이 서로를 위협의 파트너로 상정하면서 자국의 시민들을 스스로 협박했던 것이나,..그리고 오랜 동안 상대방을 권력의 기반으로 삼는 한반도 남북의 왕조세력들이 서로의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개짖기'를 시키면서 요란한 개짖는 소리로 국민들을 시끄럽게 만든 것이나..NLL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쳐다보며 열심히 멍멍거리는 일이나..)


(NLL이 보이십니까...)


이런 작업들이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는 것은 당연하다.공포라는 것은 매우 다양하다.외부로부터의 위협 만이 공포가 아니다.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공포가 북한으로부터의 위협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탈락에의 공포,생계에의 공포,고립에의 공포 등 여러가지 형태의 공포를 지배세력은 자꾸만 '어젠다'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낸다.인터넷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가 '쫄지 마'라고 외쳤던 것은 거의 자가생산 지경에 이른 정치적 공포에서 자유로워지라는 뜻이었던 것이다.(그러나 그들은 사라졌고 지배세력들은 곧바로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공포를 추가시키게 될 것이다)


2.그러나 저항 역시.


새로운 활로를 찾는다.이 영화에서의 저항의 한 소스로 제시되는 것은 의외로 영화다.큰딸은 크리스티나에게서 영화 비디오 테이프를 입수하는데,-처음에는 록키 시리즈로 생각했으나 나중엔 아마 이소룡 영화로 생각되는- 그로부터 그녀는 바로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영화 속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에게 이름을 불러대고,또 그들의 서로 다른 존재양상을 보면서,그녀는 자신에게도 어떤 다른 '호칭'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큰 딸은 여동생에게 자신을 '브루스'라고 불러달라고 말한다.스스로 자신의 호칭,자신의 존재 좌표를 만든 것이다.


아버지는 크리스티나에게 잔혹하게 폭력을 휘두름으로써 외부의 자극을 차단하고,크리스티나의 대용품으로써 큰 딸을 지명해서 근친상간의 과정으로 나아간다.절대권력의 절대부패를 근친상간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큰 딸의 머리를 빗기고 예쁘게 화장해서 동생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시작되는 이 과정은 매우 끔찍하게 그려지지만,그만큼 권력의 폐쇄성을 유지하려는 독재정권의 성향 또한 이토록이나 치열한 것이다.



또 하나의 저항의 시작은,큰 딸이 부모의 거짓말을 어렴풋이 감지하게 되면서 일어난다.부모는 자신들의 방에 전화기를 감추어두고 아버지가 나갔을 때 연락할 수 있는 주된 통로로 삼는다.큰 딸은 처음에 엄마가 방에서 혼잣말을 하는 것으로만 안다.그러나 권력에 대한 의심과 저항은 한 번 시작되면 멈추기가 어렵다.엄마가 없을 때 전화기를 들고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전혀 모르는 음성을 들었을 때,딸의 의문은 그 한계점을 넘어선다.


결국 부모의 결혼기념일 파티.딸의 감성적 저항이 폭발한다.아들이 기타를 연주하고 딸들이 거기에 맞춰 기묘한 춤을 추는 이 파티에서,큰 딸은 광끼어린 춤을 추게 되고 결국 쓰러진다.그리고 탈출을 기획한다.


3.송곳니.


이 영화에서의 '송곳니'는 탈출의 자격이다.부모는 지속적으로 자식들에게 '송곳니가 빠져야 아이가 집을 떠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올 거라고 말한다.이상한 말이다.송곳니는 공격성을 상징하는 치아다.짐승들이 송곳니를 드러내는 것은 적들을 위협하기 위함이다.외부의 적들이 도처에서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송곳니가 빠지면 집을 떠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탈주의 불가능성을 이르는 말일 수도 있다.송곳니도 없이 밖에 나가면 외부의 적들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그게 아니면 완전히 공격성을 잃어야,완벽하게 순응해야 이 집을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다.그러나 그때는 탈주의 의미를 잃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비극은 바로 거기서 생긴다.큰 딸이 스스로 아령을 들어 자신의 송곳니를 내리치기 때문이다.집을 떠나기 위해서 말이다.거짓말을 믿고서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것이야말로 폐쇄된 체제가 가져온 어쩔 수 없는 비극이다.그녀는 자신의 송곳니를 깨뜨린 후 아버지의 차 트렁크 속에 숨는다.집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그녀가 목격했던 유일한 외출 수단이 아버지의 자동차였기 때문이다.아버지는 딸에 대한 수색이 실패하자 이렇게 말한다.'개 훈련소'에 맡겨놓았던 자신의 개를 가지러 갈 거라고.개가 딸의 대용이라고.그에게 있어서 자식들은 개인 것이다.따라서 독재자에게 인간은 그냥 개다.



영화는 공장에 주차된 아버지의 자동차 트렁크- 큰 딸이 숨어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를 응시하며 끝난다.우리는 여전히 큰 딸 탈주의 성공 여부를 모른 채 영화보기를 끝내게 된다.


이 영화는 이외에도 여러가지 상징들로 가득하다.예를 들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제나 헤드폰을 끼고 섹스하며,섹스하기 전에는 포르노 필름을 본다.한계에 다다른 권력층 내부의 일탈과 부패,그들 상호간의 직접적인 관계 역시 힘들어진다는 예시일 것이다.또 아버지가 맡겨 놓은 개 훈련소 장면이 있다.개들은 철저하게 맹견 훈련을 받고 있는데,아버지의 개는 아버지를 보고서도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개 훈련소의 교관은 '훈련이 완벽하게 끝나야만' 개를 내어주겠다고 말한다.즉,폐쇄된 체제는 그 하부의 다른 폐쇄 체제와 교육기관을 거느리며,그러한 하부의 교육기관은 스스로의 논리로 작동한다는 뜻일 것이다.


4.다시 최초의 질문들로.


ㄱ.우화


이 영화가 우화라는 것을 재론할 필요는 없다.무대는 축소되었으며 배경은 리얼하지 않다.우화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영화는 블랙 코미디와 폭력성으로 헤쳐 나간다.그러나 몇몇 상징의 의미심장함과 더불어 엔딩 씬의 충격을 통하여,영화는 우화 저 너머의 곳으로 약간 이동한다.엔딩씬은 아버지의 자동차이다.자동차는 공장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고 큰 딸은 트렁크 안에 있다.우리는 그녀의 앞날을 모른다.어쩌면 딸은 그 안에서 질식해 죽었을 수도 있으며,아버지에게 들켜서 다시 집으로 붙잡혀가게 될런지도 모른다.또 그녀가 트렁크 문을 열고 나와 새로운 길을 가게 되었을런지도 모른다.(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녀의 탈주가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그녀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미성년적 탈주는 실패한다는 것.탈주에도 성년의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자동차 트렁크와 송곳니 뽑기 너머의 어떤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섹슈얼한 에너지들과 피,그리고 분노는 탈주의 단초는 제공할 수 있지만,그 이후의 완전한 벗어남에는 여전히 못 미친다는 것.그것이 저 트렁크가 보여주는 쓰디 쓴 의미이다.그리고 탈주에는 연대와 모의가 필요하다는 것.큰딸은 오로지 자신만 탈출한다.그녀는 아무도 믿지 못했다.부모의 결혼기념일 파티 이전,큰 딸이 동생에게 '내 송곳니가 흔들린다'고 말할 때,동생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즉 송곳니의 흔들림,집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을 느낀 것은 유일하게 큰 딸 혼자이다.


그녀는 동생들과 연대하지 않았고 폭력적 자해 이후에 혼자서만 탈출한다.그 이후 두 동생은 한 침대에 누워서 서로를 껴안고 있다.그것은 남은 자들의 슬픔으로 보이지 않는 장면이다.새로운 섹스 파트너를 찾았다는 아들의 각성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또다른 여동생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즉,큰 딸의 탈주가 만약 실패했다면,그것은 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고,탈주의 방법을 적절하게 모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리고 체제는 여전히 그 잔인함과 불합리함을 유지한다는 것이다.즉 이 영화는 '어떤' 탈주의 한계를 가리킨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서 체제를 장악하고 있는 아버지의 외모이다.그의 외양은 몹시나 평범하다.가끔 그가 폭력을 휘두를 때 보이는 잔학함은 그래서 더 폭발적으로 보인다.( 비디오 테이프를 딸에게 준 크리스티나를 VTR로 구타할 때,아버지는 그가 나중에 큰 딸의 머리를 후려갈길 때 보다 훨씬 더 커다란 폭력성을 보인다.) 체제의 외양이란 이토록 평범한 것이다.가장 평범해 보이는 어떤 것에서 가장 잔혹한 것들이 터져나오는 것이다.우리는 그런 것들을 미시적 독재체제라 부르면서 짐짓 무시하고,전체 구조가 혁명적으로 환골탈태하면 저절로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만,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싸움은 언제나 여러 레벨에서 지속되어야 한다.연대하면서 말이다.


ㄴ.독재체제만의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정도의 문제일 뿐,모든 체제가 폐쇄성의 문제를 다 가지고 있다.우리 사회의 언론 상황을 보자.언론들은 서로 아젠다를 주고 받는다.물론 우리 사회에서 항상 의제를 선점하는 것은 수구 언론들이다.(김대중이 탁월했던 것은 그가 언제나 의제를 선점하는 능력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소위 진보적인 언론이란 곳들 역시 수구 진영의 아젠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거의 예외없이 그랬다.올해의 선거'들'을 지켜보라.아젠다 전투에서 항상 패배했다.그것은 언론이 어떤 의미에서 '체제유지적' 기관이란 것을 의미한다.수구언론의 의제설정능력이 탁월해서가 아니다.


체제 내에서 존재근거를 지키는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체제의 안위를 위해 복무한다.(가령 대표적인 진보 언론사들에겐 그 나름대로의 '덩치'가 있다고 자신의 안정감을 지키려고 또 싸워야 한다.) 그들에게 '짜고 친다'는 혐의를 들이대는 사람들은 매우 많다.물론 그 '정도'의 문제 역시 대단히 중요할 것이다.그렇다면 무언가의 대안들이 터져나와야 한다.사람들이 자신의 송곳니를 때려 부수는 희생을 겪기 전에 말이다.


ㄷ.그리고 박근혜의 시대.


그녀의 아버지가 제왕으로 군림하던 시대는 갈 데 없는 '송곳니'의 시대였다.말들은 왜곡되었고 외부로부터의 자극은 차단되었다.내부의 동요자들은 폭력이라는 보답을 받았고 권력의 심층부는 말할 수 없이 부패했다.(그 부패를 지적했던 시 '오적'을 쓴 김지하 시인은 새로운 시대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아마 '지하경제의 활성화'라는 새 대통령의 말 중,'경제'라는 말을 못 들었나 보다).영화 <송곳니>의 많은 알레고리들은 그대로 박정희의 시대에 적용될 수 있다.


박근혜의 시대가 그리 될 거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아무도 없다.추측만이 난무할 것이다.그러나 이 영화의 몇몇 상징들을 앞으로 펼쳐질 몇몇 현상들에 꼭 대입해보아야 한다.그러나 영화 <송곳니>의 큰 딸처럼 송곳니를 아령으로 내리친 후 홀로 탈출해서는 안된다.연대와 대안이 필요하다.두려움을 이기는 연대 말이다.


우리는 트렁크에 갇혀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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